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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동문을 찾아서

제 486호 2018년 09월 (2018-09-14)

“품위 있는 국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의장으로 기억되길”

문희상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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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국회의장 



“품위 있는 국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의장으로 기억되길”


지난 7월 13일 20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문희상(법학64-68) 동문이 선출됐다. 국가 의전서열 2위인 국회의장에 그동안 모교 출신으로 곽상훈, 민관식, 채문식, 김재순, 박준규, 황낙주, 김형오, 박희태 동문 등이 이름을 올렸다. 문 동문은 9번째다. 그의 가족 중에는 모교 출신이 많다. 여동생 문인숙(국악67-71)·문재숙(국악72-76)·문희숙(조소78-82) 동문뿐 아니라 연예인 이하늬(국악02-06) 동문이 조카다. 전형적인 서울대 가족인 셈이다. 오랫동안 법대 64학번 동기회장도 했다. 그만큼 모교에 대한 애정도 깊다.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지난 8월 21일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의장접견실에서 김창균(경제80-84 조선일보 논설주간) 본지 논설위원이 만났다.


대담: 김창균(경제80-84) 조선일보 논설주간·본지 논설위원(왼쪽)


-1964년 입학 당시 스무살 청년 문희상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착한 아이였어요. 그 시대 부모님들의 바람에 어긋나지 않게 법대에 입학했지요. 사실 동생들이 예술인의 길을 걸어간 것처럼 제 속에도 예인의 감수성이 있었던지 영화감독을 막연하게 동경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소설 ‘북간도’로 유명한 안수길 씨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쪽에 소양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기에는 용기가 없었어요. 무난하게 갔지요.”


-법조인이 대한 생각은 크지 않으셨군요. 

“1학년 때는 얼마나 착실했는지 올 A를 받았어요(웃음). 그런데 당시 바깥 상황이 얌전하게 공부만 하기 힘들었지요. 중3,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문예반의 안종길 선배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학생 신분으로 시집도 낼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던 선배여서 충격이 컸지요. 1년 뒤 5·16혁명이 나면서 세상이 또 한 번 바뀌는 거 보고 놀랐고요.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던 박범진 선배 등이 하숙집에 와서 마르크스 가르치고 할 때예요. 그런 상황에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때까지도 나설 생각은 못하고 도서관에서 눈치만 살폈어요. 그런데 계속 그럴 수는 없겠더라고요.”


-당시 학생 운동의 주축은 문리대였죠.

“4·19 끝나고 문리대에서 결성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등이 학생 운동의 뿌리가 됐죠. 6·3 한일회담 비준 반대 운동을 통해 5·16 쿠데타 세력에 저항을 시작한 겁니다. 문리대가 깃발을 들고 전국 대학으로 퍼져 나갔는데 문리대 주동자들이 다 잡혀가면서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문리대와 교정이 가까웠던 법대로 학생 운동 축이 넘어온 거죠. 그런 상황에서 어찌하다 보니 제가 주동자가 됐습니다. 그때 같이 했던 동기들이 최기선, 홍정표, 조병륜, 후배로는 조영래가 있었지요.”

 

-한일회담 비준 반대 운동 당시 김종필(JP) 전 총리와 토론회를 한 걸로 전해지는데.

“5·16세력을 대표해 JP가 나와 학생들과 토론을 하려고 했지만 취소가 됐어요. 저도 법대 대표로 열심히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전에 JP가 와서 연설은 한 적이 있습니다. 뭔가 청춘들에게 어필하는매력이 있었어요.”


-2학년 때 정치의 길로 들어선 셈이네요.

“어떻게 보면 그렇죠.  그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학부 졸업 후 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해군 본부에서 법무장교로 3년간 복무했습니다. 전역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보안사 사찰대상(사찰번호 384번)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낭인 시절에 숭문당 경기 북부 총판을 개척해 키웠지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뭔가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을 때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기억에 남는 은사라면.

“당시 학장님이셨던 이한기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국제법 학자셨지요. 그분 국제법 책 서문에 ‘국제법은 다른 법과 달라 강대국이 법이라고 하면 법이 된다’고 했던 글이 인상 깊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강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옛날 신문 찾아보면 가십난에 ‘서울 법대생 서울여대 난입사건’이 있을 거예요. 당시 정형근이 주동이 돼서 술 기운에 서울여대 기숙사를 쳐들어간 적이 있었어요. 노래 잘 부르는 한 친구는 ‘창문을 열어다오’를 열창하기도 했지요. 군정 치하에서 욕구를 분출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의 치기였지요. 그때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이 우리를 준엄하게 꾸짖었어요. ‘당신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지도자들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고 우세요. 반성이 되더라고요. 성북경찰서에 다 끌려갔다 이한기 교수님이 오셔서 풀려났어요. 교수님이 ‘젊은 치기에 그럴 순 있지만 긍지를 갖고 행동해라’ 그런 말씀을 전해주시면서 ‘그런데 내가 오늘 너무 기분이 좋다’ 그래요. 고황경 학장과 동경대 유학시절 이한기 교수님이 남학생회장, 고 학장님이 여학생회장을 하셨는데 ‘건건이 고황경을 이긴 적이 없는데 너희들이 기를 꺾어줘서 기분 좋다’ 그러곤 껄껄 웃으셨어요. 좌절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올 A… 법대 6·3 학생운동 주동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  


-동숭동 명소는 어디였나요.

“학림다방과 이름은 생각 안 나는데 ‘위티’를 팔던 찻집이 있었어요. 위티는 홍차에 위스키를 탄 음료인데 비쌌어요. 어떤 친구들은 미인 마담에게 빠져서 위티 수 십 잔을 사 마셨어요. 그걸 많이 마시면 매상이 금방 오르기 때문에 많이 권했죠. 순진한 법대생 꾀기가 얼마나 쉬었겠어요. 미라보 다리라고 하나? 그 다리 아래 개천이 있었는데 술 마시면 풍덩 풍덩 빠졌어요. 물이 굉장히 더러웠는데도, 그냥 빠지는 거야. 재미있는 일이 많았지요.”


-학창시절 이야기는 이 정도로 듣지요. 국회의장 상이라고 할까. 실제 해보시면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를 것 같은데요.

“딱히 롤 모델은 없어요. 의장 맡고서 국민들의 국회 신뢰도가 다른 어떤 국가 기관보다 낮고 국회의원 스스로 무기력해져서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절히 느낍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결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법치와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죠. 이 두 기둥이 합쳐져 국회가 태어났고요. 대통령부터 국회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국민을 강조하는 대통령일수록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국회가 시녀도, 거수기도 아닙니다. 의원들도 국회가 민주주의의 꽃이요 마지막 보루라는 자긍심을 갖고 자성할 것은 자성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놔야 하겠지요. 


20대 국회는 다당제, 여소야대 국회입니다. 국회를 무시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모든 개혁, 적폐청산, 혁신의 요체는 법률 아닙니까. 개혁하려면 국회와 손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대 국회는 역사적으로 대격변기에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기반들을 제도화해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협치를 통해 개헌과 개혁입법도 이뤄내야 하지요. 그게 1,700만 촛불혁명의 준엄한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 입법 중 대표적인 것은.

“공수처 법이라고 봐요. 그걸 기점으로 판문점 선언에 대해서 국회에서 비준 절차를 밟아야 하고요.”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대통령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점에는 여야 국회의원들의 합의가 이뤄진 것 같아요. 대통령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권력구조 개편만을 주로 이야기 하는데 지방자치의 활성화, 예산권, 자치 조직권 등을 주는 것도 중요한 권력 분산입니다. 수평적으로 쪼갤 생각만 하니 대통령제 없애고 내각제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건 국민 다수가 원하지 않아요. 정·부통령제, 4년 중임제도 권력 분립의 일종입니다. 우리 헌법은 사실 완벽한 대통령 중심제를 표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국무총리에게 많은 권한이 적시돼 있어요. DJ 정권에서 헌법대로 운영하려고 했죠. 야당 대표인 JP가 총리를 하면서 경제부분 각료 임명권과 해임권을 다 줬지요. 우리 헌법에 내각제 요소가 없는 게 아닙니다. 운영하기에 달렸어요.”


-그럼 개헌까지 필요 없지 않나요.

“그러나 조금 미약한 부분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거지요. 선출은 임명을 동의하는 것과 달라요. 지금 특검처럼 국회에서 2명을 선출해 한 명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하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무총리가 책임 총리제를 할 수 있고 책임 총리가 장관 임명하면 장관들도 책임 장관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선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지, 모 아니면 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하실 때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하셨지요. 당시 일화를 들려주세요.

“저는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을 반대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 검찰 개혁인데, 검찰 개혁을 하기에 적당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정수석으로 임명되기 전 만났는데 눈망울이 사슴 눈처럼 너무 선해 보여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검찰개혁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는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분은 균형 감각이 있다. 또 통찰이 있다. 선후좌우를 다 살펴보고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런 면에서 존경한다.’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봤어요. 노무현 정권 초에 경찰청장 인사에서 매제인 이상업 씨가 물망에 올랐어요. 평판, 출신 등 여러 가지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민정수석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거예요. ‘평판 점수는 좋지만 대통령과 고향이 같고 비서실장의 매제인데 첫 인사를 이렇게 하면 국민이 납득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더라고요. 제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어요. 맞는 말이잖아요. 저는 인사 문제에 있어서 문 대통령을 신뢰합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려는 성향도 강하고요.”



-정치 인생에서 보람된 일을 꼽으라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지요.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어요. 당선 된 날 새벽 4시쯤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 말이 맞았죠, 평화적 정권 교체 이뤘죠’ 하며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화해를 했어요. ‘이제 죽어도 좋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덤이다.’ 그런 기분으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대통령 비서실장 그런 게 감격스러운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가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두 번 역임하신 박정희 대통령 추종자셨어요. 1970, 80년대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다니는 것은 곧 빨갱이란 말이었지요. 저 때문에 수모를 많이 당하셨어요. 경기 북부가 얼마나 보수색이 짙은 곳입니까. 그런데 제가 14대 선거 나오니까 노구를 이끌고 ‘아들 새끼 사람 만들어 달라’고 유세장을 누비고 다니셨어요. 연설 도중에 구부정한 허리로 다니시는 걸 보니 눈물이 쏟아지고 말문이 막혀요. ‘만약 내가 떨어지면 대못 하나 박고 살아야 합니다. 효자 좀 되게 해주세요.’ 눈물로 호소했지요. 국회의원 당선 되고 아버님께 인사드리려고 갔어요. 48개 노인정에 돼지고기 돌려주고 오셔서 좀 지쳐 보이세요. ‘나는 할 일 다 했다. 두 가지 잊지 마라. 큰 손자 나 죽기 전에 장가보내라. 그리고 정치 끝나는 날까지 초심을 잊지 마라.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그렇게 말씀하시고 극적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떤 국회의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성숙하고 품위 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의장, 국민의 신뢰와 사랑받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체계가 바뀌고 여러가지 기술이 발전해 모바일 등으로 의사 결정이 제도화 되면 의회가 할 일이 없어지겠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의회주의로 가야 합니다. 국회는 싸우는 곳이에요. 생각, 이념, 지역, 대변하는 이익단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일사불란하면 독재지요. 비효율적인 것을 감내하고 이 제도를 인정한 이상 국회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문 동문은 


1945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4·19 혁명부터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 그리고 2016~2017년 촛불에 이르기까지 네 번의 민주 항쟁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겪었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79년 동교동에서 당시 재야인사 김대중(DJ)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날 DJ가 말한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 삶을 걸었다. DJ의 지시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30만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의정부에서 1992년 14대 총선부터 15대를 제외하고 6선을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과 안기부 기조실장을 역임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의 정치 인생의 정수를 담은 ‘대통령 : 우리가 알아야 할 대통령의 모든 것’(경계, 2017년 3월 발간)은 정치에 관심 많은 독자들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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