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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3호 2016년 10월 (2016-10-18)

100세 화백 김병기, 개교 기념전에 ‘Action In Mountain East’ 출품

“예술은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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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화백이 출품한 작품 'Action In Mountain East’


100세 화백 김병기 “예술은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


개교 기념전에 ‘Action In Mountain East’ 출품
1953~1957년 서울대서 현대미술 형성론 강의



국내 최고령 화백 김병기(100) 작가가 서울대 개교 70주년 기념 특별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해방과 분단, 전쟁기를 치열하게 산 예술가이자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는 1953~57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서울대와 인연을 맺었다. 모교 규장각 관장과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송기중(국문61-65) 동문이 사위고, 백혜란(회화74졸) 화가가 며느리이기도 하다.


지난 9월 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김병기 화백은 그림 작업이 한창이었다. 서울대총동창신문에서 왔다는 말에 “중요한 신문이지”하며 소파에 앉았다. 노환으로 귀가 어두웠지만 말은 분명했다. 서울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이니 건강 질문 같은 상투적인 것은 묻지 말고 학구적인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2시간에 걸쳐 서울대, 통일, 예술관에 대해 묻고 들었다.


-작업 중이셨군요. 하루에 몇 시간이나 그림을 그리세요?
“작가(Artist)는 장인이 아니에요. 시간을 정해두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생각나는 대로 붓을 들지요.”


-그림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서양화를 하지만 선을 그릴 때 한 획으로 마무리 합니다. 덧칠하지 않아요. 제 작품은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이 주는 미, 함축성이 있어요. 인생도 미완성이라 아름다운 거 아닙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좋아합니다. 성자가 돌로 자신을 치는 모습을 그린 건데, 미완성작이라고 합니다.”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 예술관을 피력했다.
“8.15 해방 후 어떤 분들은 고고하게 화실로 들어가요. 저는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밖으로 나와서 민중과 더불어 그림 그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치중했어요.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서울대 30주년 기념식 때 윤명로 후배가 1등석 표를 주며 초대했어요. 파리에 있을 때죠. 이코노미석으로 왔어요. 작가는 1등석 타면 안 돼요. 작가는 대중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귀족이 아닙니다.” 세잔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연과 형상 중간에서 허덕이는 고뇌와 회의의 정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시회에 출품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전시회 주제가 좋아요. 나눔과 통일. 작품 수익금으로 통일 인재를 키우는 데 사용한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평양 출신 아닙니까. 통일을 저만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열리고 있는 ‘경계와 접점 : 시대와의 대화(통일부 주최)’ 초대전에 저와 서세옥 씨가 초청 받았습니다. 거기에도 몇 작품 출품했습니다. 몇해 전부터 산하재(山河在)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하는 있다’는 두보의 싯구에서 따왔어요. 나라는 두 동강 났지만 자연은 여전히 그대로 있지요.”


청년시절 좌우를 포용하며 미술단체 결성에도 적극적이었던 그에게 극도로 긴장된 남북 상황에 대한 견해를 묻자 “나는 화가에요. 그림으로 말할 뿐입니다”라며 말을 아끼면서도 아래와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었지만 쓸 데가 없어요. 쏜다고 하면 미국이 먼저 공격할 거예요. 그렇다고 미국도 함부로 쏠 수 없어요. 서울이 위험합니다.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용이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다 죽어요. 북한을 무력으로 압록강 저쪽으로 몰아 놓잖아요? 가만있지 않지요. 싸움은 계속 될 거예요. 몰아서 해결이 안 됩니다. 통일 앞둔 우리의 현실입니다. 대화로 해야지요. 북한은 봉건 체제라 결국 사라집니다. 시장 경제 체제로 편입되도록 유인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출품작 설명을 해주세요.
“미국 LA에 살 때 그렸습니다. 8층 아파트에서 황무지 산이 보였어요. 1965년 한국 떠나올 때 본 민둥산과 비슷하더라고. 동부에 살다 LA에 오니까 절반은 동양에 온 것 같았어요. 산도 그랬고요. ‘Action In Mountain East’의 이스트가 위치상으로 동쪽의 뜻도 있지만 동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울대와 인연은 어떻게 되세요.
“전시 부산에서 장 발 선생님에게 스카웃 됐지요. 평론가로 더 열심히 활동할 때였어요. 1951년 봄으로 기억합니다만, 시사주간지 ‘타임’에 소개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봤어요.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입니다. 제가 보기에 극심한 선전 미술이에요. 북한에 있던 최승희 남편 안 막이 굉장히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그걸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래서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결별 선언을 했지요. 그런데 우표값이 있나. 그냥 남포동 다방에 시인, 화가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을 했어요. 그랬더니 서울대에서 장우성 씨가 장 발 선생님의 전갈을 갖고 온 겁니다, ‘다방에서 예술론 하지 말고 교단에서 하라’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로 갔지요.”


-기억나는 학생이 있으세요.
“부산에서 동숭동 캠퍼스까지 와서 학생들에게 현대미술 형성론을 가르쳤어요. 동숭동 시절에는 미학과도 미술대학에 있어 응미과, 서양화과, 조각과 학생들이 다 함께 들었어요. 김 태, 방혜자 등이 기억납니다. 그 친구들에게 사실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미술사를 강의했지요. 당시 서울대 미대는 구상회화를 추구했지만 미국의 회화 흐름이 추상으로 가니까 저 같은 사람이 필요했지요.”


그의 답변은 현대미술사 강의(?)로 이어졌다. 인상주의에서 세잔을 거쳐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추상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을 설명했다. ‘피카소와의 결별’을 발표한 이후 그는 ‘동양화의 현대성-대한미협 동양화전(동아일보)’ 등 신문에 발표한 짧은 전시리뷰는 물론 월간지에 ‘추상회와의 문제(사상계)’, ‘전통이란 것과 새로운 것(새벽)’, ‘한국의 전위미술-현대작가전과 60년전(자유문학)’, ‘제10회 국전평: 국전의 방향-아카데미즘과 아방가르드의 양립을 위하여(사상계)’ 등의 제법 긴 시평과 예술론을 발표했다.


-서울대에서 교수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을 텐데, 중간에 나오셨어요.
“장 발 선생님이 스카우트했다고 했지요? 그분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저도 영세를 받고 그 분이 대부가 돼 루이아란 세례명도 주셨어요. 장 발 학장님의 대변인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승만 정부에서 문화부 관련 일을 맡았어요. 장 발 학장님이 본인을 밀어내고 들어온다고 의심을 하셨어요. 그만두고 서울예고로 가 초대 미술과장이 됐지요. 서울예고는 그 전부터 관여하고 있었고요. 제가 감투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인 처음으로 국제 비엔날레(1965년 상파울루) 심사위원도 맡았지만 행사 후 미국에 정착한 것도 별로 미련이 없어서였지요.”


김 화백은 이중섭 화백과 소학교(초등학교),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를 다닌 동기 동창이다. 그는 이중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중섭이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그림 하는 태도를 보여 줬어요. 아내와 애들 있는 일본에 갔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형제(남북)가 싸우는데 어디 피난 가 있느냐 이거에요. 거기에 이중섭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중섭의 포인트는 ‘반 커머셜리즘’이에요. 누구한테 보이려고 하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렸어요. 이중섭 주검을 발견한 게 접니다. 적십자 병원에 만나러 가니까 없어요. 시체실에 있어. 친구들한테 알렸더니 20명이 모여 홍제동서 화장을 지내줬어요.”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후 김 화백은 한 잡지에 이런 글을 썼다. “큰 브러시로 좋은 캔버스에 그리지 않았다고 이중섭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은박지 골필화, 데생으로 6·25 동란이라는 리얼리티를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대변했다.”


- 후학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통로가 아니에요.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갖고 있어요. 한국이 앞마당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의 주인이에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예술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미술계는 커머셜리즘만 판칠 뿐 정신을 리드하는 움직임이 없어요. 정신을 리드해주시기 바랍니다.


푸른 지중해가 보이는 알제리아의 해안, 로마의 유적이 폐허로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말했습니다. ‘예술은 폐허 위에 맺힌 이슬’ 이라고. 예술은 오늘의 이슬이 돼야 합니다.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은 시대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아방가르드가 돼야 합니다. 아방가르드에 연령은 없습니다. 예술은 ‘포에지(Poesie 시)’가 있어야 합니다.” 김남주 기자



한국인 첫 국제 비엔날레 심사위원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 형성 초기에 예술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서양화 기법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선구자 중 한 명인 부친 김찬영에 이어 일본으로 유학한 그는 가와바타 미술학교와 도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서양 미술 사조를 접한 후 추상미술이 우리나라 화단에 수용되는 데 이론적인 길잡이가 됐다. 귀국 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냈으나 6·25 전쟁 발발 전인 1948년에 월남해 서울예고 설립에 기여하고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 미술 교육의 토대를 다졌다.


한국미술협회 3대 이사장을 거쳐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커미셔너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미국에 정착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86년에 가나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백수를 넘긴 고령에도 오늘의 리얼리티를 화폭에 담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발행한 ‘김병기 : 감각의 분할’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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