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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5호 2017년 10월 (2017-10-18)

동숭로에서: 낯선 죽음과 문학

정 찬 소설가·동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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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죽음과 문학


정 찬(국어교육74-78)
소설가·동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캠퍼스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1학년 때의 캠퍼스는 교양과정부가 있던 공릉동 공과대학이었다. 1974년 당시 공릉동 일대는 배밭이 많은 시골마을이었다. 그해 봄의 날씨는 이상했다. 3월은 물론이고 4월이 되어도 거센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봄은 소리 없이 들어와 있었다. 따뜻한 햇살 속에서 흰 배꽃들이 눈을 시리게 했다. 배꽃 너머 서녘하늘은 진홍이었다. 간혹 진홍 속으로 파고드는 말발굽소리를 듣곤 했다. 보이지 않는 말들의 갈기가 심장 박동을 높였다. 노을이 없는 날의 서녘하늘은 배꽃처럼 희었다.

-왜냐하면 파이드로스여, 잘 들어두어라. 아름다움만이 신의 것이고 동시에 인간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란다. 그러니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인 인간이 걸어가는 길이요, 또 예술가의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
배꽃처럼 흰 서녘하늘 아래서 나는 늙은 현인 소크라테스가 청년문필가 파이드로스에게 인간의 눈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의 신성한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되뇌며 내가 가야갈 문학의 길을 더듬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차가우면서 어두웠고, 불가해했다. 문학은 차갑고 어둡고 불가해한 세계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별이었다. 정신의 시선이 지상에 갇혀 있을 때 나는 맹인이었다. 어둠에 잠긴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두 팔은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 거기에는 별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따뜻한 별빛이 느껴졌다.

내가 찾고자 한 것은 별에 이르는 길이었다. 언어로 이루어진 그 길은 영혼의 성소를 품고 있었다. 언어는, 영혼의 성소를 품고 있는 언어는 삶의 황야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나는 열망했다. 영혼의 성소 앞에서 무릎 꿇을 수 있기를. 그것은 꿈의 형상이었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엄성이었다. 역사의 존엄성은 언어가 품고 있는 꿈의 존엄성을 따르지 못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이듬해 옮겨간 관악산 캠퍼스는 낯설었다. 산을 깎아 지은 그 거대한 캠퍼스가 나의 기억 속에는 지금까지도 스산한 풍경으로 각인되어 있다. 세월의 흔적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의 말끔함과 반듯한 아스팔트 길, 갓 심어 어설프게 보이는 나무들의 을씨년스러움이 스산한 풍경을 각인시키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그해 4월 낯선 죽음과 마주쳤다.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이 수원 캠퍼스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며 할복, 4월 12일 운명한 것이다. 구속학생 석방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였다. 그가 남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에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죽음으로써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이 가지 않도록,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상진의 죽음 앞에서, 죽음을 품고 있는 그의 언어 앞에서 나는 ‘혼란스러운 파이드로스’가 되어 황량한 캠퍼스를 떠돌았다. 당시 나에게 역사는 문학이라는 꿈의 주변부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풍경으로 존재할 뿐인 역사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상처와 운명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나를 놀라게 하고, 상처와 운명을 자극한 것은 풍경 너머에 있는 허공의 길이었다. 나의 꿈은 역사와 격절되어 있었다. 그들이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김상진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풍경으로 존재할 뿐인 역사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꿈과 역사의 관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기까지 세월이 더 요구되었지만, 변화의 계기가 김상진의 죽음이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정 동문은 부산 출신으로 모교 국어교육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소설 '말의 탑'으로 등단 후 단편 '푸른 눈'을 발표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데뷔 이래 줄곧 권력과 인간의 관계, 신과 구원의 문제 등 주로 관념의 세계를 치밀하게 천착해오며 '슬픔의 노래'로 1995년 제26회 동인문학상, 2003년 '베니스에서 죽다'로 제16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노래'는 5월 광주 계엄군 출신인 연극배우를 중심으로 세속의 권력과 인간의 악을 향한 욕망, 진정한 선의 의미 등을 성찰하고 있다.

소설집으로 '기억의 강', '완전한영혼', '아득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 장편소설로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 '빌라도의 예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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