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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7호 2015년 06월 (2015-06-19)

[서울대와 6 25] 동문기고 : 누가 서찬식을 모르시나요?

미주에 사는 서안희 [간호 65입]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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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가 6?25 전쟁 말기 싸움이 가장 치열했다는 백마고지 싸움터에서 오른쪽 다리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육군 이동 병원에 옮겨졌으나 심한 출혈로 숨졌다고 하는 전사통지서였다”


6?25 당시 만 6세 미만의 막내인 내게는 오빠가 세 분 있었다. 나의 큰오빠 서찬식은 6?25 당시 서울대 약학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승무도 잘 추고 단소도 잘 불었다. 사진 찍기도 좋아했고, 단아한 용모의 큰오빠는 장난기도 많았다고 한다.


6?25 나던 해 8월 16일에 장충동 공원 부근의 우리 집으로 인민군 세 명이 갑자기 찾아왔다. 6?25 당시에 대한중석주식회사의 부사장 겸 상무이사이신 우리 아버지를 인민군 사무실로 모시고 가 물어볼 게 있다 하며 염려스러워 묻는 엄마에게 삼일이면 곧 돌아오신다고 몇 번이나 염려 마시라고 안심시켰다. 그것이 내 일생에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서찬식 약대 동문


큰오빠는 막내 여동생인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6?25 전쟁이 진행되자 큰오빠는 어린 여동생이 전쟁통에 영양 부족이 될까봐 그 전쟁 중에 암시장에 가서 계란을 한 줄씩 사서 엄마 장롱 속에 넣어놓고 한 개씩 삶아서 내게 줬다. 엄마가 네 살 위인 셋째 오빠도 좀 주라고 해도 나만 꼭 한 개씩 삶아서 줬다.


우리는 1?4 후퇴 무렵 부랴부랴 큰고모네가 트럭을 한 대 구해서 피난하려 했다. 큰오빠는 바로 그 무렵 군 징집 영장이 나왔다. 어린 나는 속으로 큰오빠도 같이 트럭 타고 피난갔으면 했다. 큰오빠는 집에 있는 호랑이 담요로 나를 싸 안아서 피난행 트럭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안자(어려서 집에서 부르던 이름)는 착하니까 언니 말 잘 듣고 있어” 하고 몇 번이나 내게 당부를 했다. 그것이 나와 큰오빠와의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피난행 트럭에 타지 않고 큰오빠와 장충동 집에 남으셨다. 내가 떠나고 나니 큰오빠는 “안자가 없으니 집이 빈집 같네” 하고 몇 번이고 엄마한테 말하며 허전해했다. 그러면서 “고거 잘 지낼까? 엄마 보고싶어 안 할까?” 하다가도 “고게 야무지니까 잘 지낼 거야” 하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빠를 군대에 떠나보내고 엄마가 우리가 피난한 대전으로 오셨다. 그러면서 큰오빠가 나를 떠나 보내고는 암시장에 가서 ‘허쉬’ 초콜릿을 몇 개 사서 엄마보고 나 갖다주라고 줬다고 하신다. 나는 지금도 ‘허쉬’ 초콜릿을 볼 때마다 큰오빠 생각을 한다. 큰오빠는 그 전쟁통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동생의 성탄 선물을 준비하고 어린 내게 편지도 썼다. 나는 생각한다. 큰오빠는 입영 전날 무슨 생각으로 그 어린 나에게 편지를 썼을까?


큰오빠는 입영 후 곧 육군 소위가 됐다. 피난지 대전 셋방집으로 언니에게 보낸 큰오빠의 편지가 한두 번 왔다. 매번 편지에 아버지가 유별히 예뻐하시던 나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과 아울러 장남인 자기가 이런 힘든 때에 집안을 못 돌본다고 누나한테 죄송하다며 조금만 참으면 자기가 군에서 돌아오고 납치돼 가신 아버지도 돌아오셔서 다시 행복한 집안이 될 것이라고 언니를 위로하는 장남의 모습을 보여줬다. 겨우 대학 2학년밖에 안 됐던 큰오빠였다.


전쟁중 서찬식동문이 동생 서안희 동문에게 보낸 편지



한두 번 큰오빠 편지를 받은 후 하루는 피난 셋방으로 군인이 찾아왔다. 무엇인가 엄마한테 전하고 갔다. 그 군인이 돌아간 후 엄마와 언니의 통곡이 터지고 대성통곡이 끊어지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하는 어린 나를 같은 셋집에 사는 젊은 부인이 구멍가게로 데리고 갔다. 가서 사탕과 삶은 번데기 한 봉지를 사서 내게 안겨줬다. 나는 영문을 몰라했다.


큰오빠가 6?25 전쟁 말기 싸움이 가장 치열했다는 백마고지 싸움터에서 오른쪽 다리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육군 이동 병원에 옮겨졌으나 심한 출혈로 숨졌다고 하는 전사통지서였다. 큰 출혈로 의식이 가물가물해 가는 나의 큰오빠는 무슨 생각을 끝까지 했을까?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과 어린 나를 의식이 있는 끝까지 생각하고 우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큰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아프게 나의 마음을 건드린다.


서울 수복 후 들으니 우리가 살던 장충동 집에 지프차 탄 젊은 육군 장교가 와서 빈집을 샅샅이 둘러보고 갔다고, 피난을 안 가고 남아 있었던 동네 할머니가 엄마한테 알려줬다. 엄마는 내가 피난가지 말고 집에 남아있었으면 우리 찬식이를 한 번 더 봤을 텐데 하며 몇 번이고 후회와 한탄의 말씀을 되뇌셨다.


나는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조교 시절 결혼해 바로 미국으로 왔다. 남편이 박사 논문 준비로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나도 함께 그 도서관에 갔다. 6?25 당시의 한국전쟁 모습을 사진에 담은 LIFE 잡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혹시 인민군에게 잡혀 이북으로 끌려가는 아버지 모습이나 육군소위인 큰오빠의 모습이 찍혀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사진과 기사를 모두 찾아 읽어봤지만 LIFE지에는 자기 나라 국민인 미군들 모습 위주로 게재돼 있었다.


한번은 이모들이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다. “언니, 언니는 그런 큰일을 당했는데 남편이 더 마음에 아파? 아니면 아들이 더 마음에 아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좀 잔인한 질문같이 생각돼 엄마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엄마는 “남편을 생각하면 살을 에이는 고통이고 아들을 생각하면 뼈를 깎는 아픔이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엄마의 그 말씀은 나의 뼛속까지 와 닿았다.


엄마는 큰오빠가 전사한 후 나라에서 나오는 얼마의 그 돈에 손을 대기를 꺼려하셨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그것에 손을 대…” 하시는 것이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데도 내내 그래서 내가 “엄마, 그건 큰오빠가 엄마한테 용돈을 드리는 거예요. 용돈이에요”라고 말해드렸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그 이후는 “나는 큰애가 용돈을 주고 있어” 하시며 친구분들과 여행하시는 데 보태 쓰셨다. 큰오빠가 드린다는 게 그나마 엄마의 애통함을 잠시나마 보듬어 드렸는지….


한국 방문시 엄마와 같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큰오빠 육군 소위 서찬식 묘소 앞에 섰다. 준비해간 빨간 장미 꽃송이들을 묘소에 꽂아 드리고 엄마와 나는 묘비에 한없는 눈물을 뿌렸다.


큰오빠는 1931년 1월 2일 생으로 1951년 5월 9일 육군 제3이동외과병원에서 너무 안타깝게도 돌아가셨다. 아름다운 꽃송이가 막 피어날 때 모진 전쟁의 피바람에 떨어진 큰오빠 서찬식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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