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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7호 2017년 12월 (2017-12-14)

녹두거리에서: 다시 ‘생동’을 들고

문지혁 소설가 에세이

조회수 : 2798  좋아요 : 0

다시 ‘생동’을 들고


문지혁
영문98-05
소설가

녹두거리를 생각하면 언제나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때는 1998년, 코끝에 닿는 찬바람이 매서워지는 계절이다. 영문과 신입생인 나는 양손 가득 인쇄물 꾸러미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무겁긴 하지만 그렇다고 땅에 내려놓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다. 꾸러미 안에는 막 인쇄소에서 찾아온 잡지 100여 부가 들어 있다.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과방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늦은 오후지만 부디 사람이 많았으면, 그래서 이 잡지를 더 많이 나누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바람이 불어 꾸러미 위에 덧댄 종이가 뒤집히면서 표지가 드러난다. 잡지의 이름은 ‘생동’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장 열심히 한 일은 과 편집부 일이었다. 당시 영문과에는 여러 학회와 더불어 몇 개의 소모임이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과 소식지 ‘생동’을 만드는 편집부였다. 대학신문사처럼 큰 기관도 아니고 중앙동아리처럼 번듯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몇몇이 모여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사실에 끌렸다. 적극적으로 부원을 유치하려는 다른 학회나 모임과 달리 조용하고 차분하던 편집부 선배들의 태도도 한몫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편집부에서는 수십 페이지 분량의 ‘생동’을 격주로 발행했는데, 전문적인 훈련도 받지 않은 학부생들이 주먹구구로 덤벼들기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결국 마감 때가 되면 몇 안 되는 편집부원 모두가 전산원에 모여 밤늦게까지 기사를 쓴 다음 그걸 편집해서 녹두의 인쇄소로 넘기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인쇄소에 데이터를 맡기고 나오면 늦은 시간 탓인지 홀가분함 때문인지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화제는 다음 호에 실을 기사로 옮겨가곤 했다.

며칠 후 완성된 잡지를 찾으러 가는 일은 나 같은 신입 부원의 몫이었는데, 귀찮음보다는 설렘이 늘 먼저였다. 우리 손으로 만든 ‘생동’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편집부장을 마치고 3학년 여름방학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편집부와 ‘생동’은 내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나는 편집부 경력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력서에 써넣기에는 어딘지 민망한 경력이었다. 지나치게 진지했던 내 모습이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력에 도움도 되지 않을 일에 그토록 매진했을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20대 어느 무렵에는 그런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수많은 ‘생동’들을 원망 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던 일은 결코 이력서에 적어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모두 생동하는 삶을 꿈꾼다. 매일의 일이 나를 살아있게 하고 변화시키는 일이기를 원한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생동이 생활이 되고, 다시 생활이 생존이 되면서 우리의 일상에는 피곤과 권태만이 남는다. 시간이 흘러 나는 작가가 되었다. 돌아보면 편집부에서 시작된 어떤 궤적이 용케 여기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러나 글이 일이 되고 책이 업이 되면서 나는 종종 이력서 앞의 20대처럼 혼란스럽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을까. 내가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어쩌면 19년 전의 녹두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들고 있던 ‘생동’이야말로 지금 내가 잃어버린 생동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양손 가득 무거운 종이 꾸러미를 들고,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린다. 과방에 남아 있을 반가운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문 동문은 모교 영문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 전문사를 거쳐 뉴욕대에서 인문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P의 도시', '사자와의 이틀밤, 장편소설 '체이서'를 비롯해 여행에세이 '이야가 번지는 곳 뉴욕', '혼자가 아닌 시간 홋카이도'를 발표하고, 번역자로도 활동하며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등의 책을 옮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글쓰기와 소설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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