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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9호 2018년 12월 (2018-12-18)

동문기고: 낙엽 지는 대학로를 걷다가

임재훈 성균관대 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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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대학로를 걷다가

임재훈

의학66-72
성균관대 의대 명예교수


대학로에 단풍이 곱다. 대학로에 옛날 동숭로의 모습과 정취는 거의 사라졌지만, 의과대학과 문리과대학 캠퍼스에 있었던 나무들이 아직 그대로 있어서, 여기가 동숭로였고 대학 캠퍼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 흐르던 작은 개천을 덮어 길을 넓혔고, 대학 정문 앞의 시내버스 정류장은 지하철역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 길은 젊은이들의 길, 청춘의 거리다.

이 활기 넘치는 대학로에 가을 단풍이 곱게 들었다. 바람이 부니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잎이 비 오듯 우수수, 우수수 떨어져 길에 뒹군다. 나무에 달려있는 얼마까지는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 주지만, 떨어진 낙엽은 우리들 가슴에 조용한 우수를 남긴다.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게 한다.

의과대학에서 대학로를 건너면 마로니에 공원이 나온다. 나는 가을 코트를 입고 코트 깃을 세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갔다. 50년 전의 젊은 마로니에 나무들은 이제 장년이 되었고, 그때 장년이었던 은행나무들은 고목이 되었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사이의 작은 마당에 여러 개의 벤치가 놓여 있다. 그 벤치에 앉았다. 옛날 어느 여름 저녁, 나는 이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애인과 첫 키스를 하였다.

대학 정문을 바라보고 서있던 벽돌 건물, 매년 대학 합격자 명단이 걸리던 인문사회 강의실은 모두 헐리고 붉은 벽돌로 멋을 부려 새로 지은 예술극장이 되었고, 오른쪽 마로니에 나무 뒤의 도서관과 작은 서점 자리에도 극장 건물이 들어섰다. 5층짜리 과학관과 운동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소극장, 공연장, 문화관, 레스토랑, 예쁜 카페들이 무수히 서 있다. 공원 왼쪽에 있는 3층짜리 갈색 벽돌집, 그때 대학교 본부 건물이었는데, 그 많던 건물 중 이 고풍스런 건물 딱 한 개만 남아 있다.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지었던 마지막 남은 고적(古蹟)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풀밭도 있었다. 강의 끝나면 다음 강의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 풀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며 노래도 부르고,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었다.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얘기도 하고, 벼락치기 시험공부도 하고, 친구를 기다리고, 애인도 기다리고, 처음 어설프게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딱지맞고 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던 곳이다.

세느강. 그때 이 앞을 흐르던, 혜화동에서 동숭로를 따라 종로 5가를 거쳐서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좁은 개천을 우리는 세느강이라 불렀고, 의과대학에서 문리과대학으로 세느강을 건너가는 다리를 미라보다리라 했다. 세느강 동쪽에는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있었고, 서쪽에는 의과대학, 약학대학과 미술대학이, 북쪽 혜화동에 수도의과대학이, 그리고 그 옆 명륜동에 성균관대학이 있었으니, 마치 옥스퍼드의 하이스트리트와 케임브리지의 킹스퍼레이드를 따라 여러 대학 칼리지들이 서있듯이, 세느강변을 따라 여러 대학들이 늘어서있던 이 거리는 대학생들의 거리였다. 지금은 다섯 개 대학이 사라졌고 대학로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그때 동숭로, 세느강과 미라보다리는 많은 대학생들의 꿈과 정열과 낭만이 넘치던 거리였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후, 세느강도 없어지고 미라보다리도 사라지고, 반짝반짝한 새 건물들만 들어차 있는 거리,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 거리가 말할 수 없는 애수를 불러온다.

내가 앉아 있는 맞은편 벤치에 60은 넘었을 법해 보이는 여인이 혼자 앉아 있다. 회색 코트를 입고 자주색 핸드백을 무릎에 얹고 쓸쓸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불현듯 옛날 영화, ‘만추(晩秋)’에서 보았던 수심에 찬 여주인공의 모습이 스쳐간다. 왜 혼자서 쓸쓸히 여기 앉아 있을까? 핸드백에서 책을 꺼내 든다.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니 무슨 시집일 것이다. ‘국화 옆에서’ 같은 서정주 시집일까, 정지용의 시집, ‘향수’일까, 아니면 혹시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시, ‘미라보다리’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이 학교 국문과 또는 불문과를 다녔던 여학생이었을 성싶다. 이 여인은 사랑을 잃은 것인가, 세월을 잃은 것인가? ‘만추’의 여인처럼 여기서 그 잃은 것을 기다리는 것인가? 늦가을 날, 벤치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암연히 수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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